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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라틴어 수업

라틴어 수업 - 한동일 지음

'알바alba'와 '에스트est'는 무엇과 비슷할까요? 계속 상상해보지만 뭔가 알 듯 말 듯 여전히 희미한 안개 속에 있는 것 같을 겁니다. 학생들과 수업을 할 때에도 미리 답을 알려주는 대신 이처럼 생각해보게 합니다. 조급함을 내려놓고 알고 있는 영어 단어와 상당히 비슷한 점이 많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보라고 이야기합니다. '영어 따로, 라틴어 따로'가 아니라 종합적으로 연결시켜보라고요. 그래서 저 문장이 무슨 뜻이냐고요?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이런 식으로 학생들의 머릿속에 '책장'을 마련하는 작업은 이 책장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 내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성찰로 나아갑니다. 사실 그것이 수업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데 메아 비타De mea vita' = 나의 인생에 대하여

'놀리테 티메라Nolite timere!' = 두려워 말라

대학은 취업을 위해 졸업장을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청년들이 스스로에 대해 들여다보고 더 나아가 진리를 탐구하며, 작 삶을 사랑하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도록 돕는 곳이어야 합니다. 학생들도 대학 생활 동안 맹목적으로 어떤 목표부터 세울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을 우선해야 합니다.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할 때 즐거운지 세심하게 관찰해야 하죠. 봄철의 아지랑이가 무심히 길을 걸을 때는 보이지 않고 멈춰 서서 유심히 관찰해야 보이듯이, 내 마음속의 아지랑이도 스스로를 유심히 들여다봐야 볼 수 있는 것이죠. 지금의 내 모습이 나의 전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나이가 많든 적든 각자 살아온 삶이 있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 문제를 정립하고 해결해왔을 겁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틀이 논리이고 그것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아직 깨닫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안의 논리와 만나기 위해 시간을 들여 성찰해야 하며 그것을 바른 방향으로 정립시켜나가야 합니다.

공부하면서 맞닥뜨리는 슬럼프나 실패의 경험은 우리를 쉽게 좌절시키죠. 특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부에 대해서는 시작부터 완벽하게 하려는 경향이 있고 항상 '열심히' 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 잡혀 있어요. 이 부담감 또한 우리를 쉽게 지치게 만듭니다. 그런데 겸손한 사람이 공부를 잘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겸손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정확히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실패의 경험에 대해 지나치게 좌절하고 비관하기 쉽습니다. 이것은 '실패한 나'가 '나'의 전부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건 자기 자신을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일종의 자만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한 번의 실패는 나의 수많은 부분들 중 하나일 뿐입니다. 그것 때문에 쉽게 좌절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 잘 못 이해한 겁니다. 우리는 실패했을 때 또 다른 '나'의 여집합들의 가능성을 볼 수 있어야 해요. 그리고 그 여집합들이 잘해낼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하죠. 이렇게 자신이 가진 다른 가능성들을 생각하고 나아가는 것이 겸손한 자세가 아닐까요?

공부는 단발적인 행위로 결과를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라톤과 같은 장기 레이스가 그렇듯이 공부에 대한 강약 조절과 리듬 조절을 해야합니다. 이것에 실패하면 금방 지치거나 포기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가 지치지 않도록 공부를 대하는 태도를 조절해야 합니다.

때로는 공부를 '열심히'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해요.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놀았다' 라고 말하며 자책합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말 그대로 논 것만은 아니지 않을까요? 대부분 공부를 시작하면서 '열심히'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또 그렇게 하지만 실제로 그 '열심히'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해 괴로워하는 경우가 있어요. 하지만 이것은 단지 스스로 생각한 성과나 남들이 보기에 그럴듯한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을 뿐이지 정말로 열심히 하지 않은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절대 기준에 자기 자신을 맞추려 하고 거기에 못 미치면 괜한 좌절감을 맛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열심히'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이 나의 '최선' 일 수도 있습니다.

공부를 항상 열심히 할 수만은 없고 또 그렇게 되지도 않습니다. 이건 당연한 사실이에요. 어떤 날은 컨디션이 좋아서 집중이 잘되고, 그러면 목표를 넘어서는 성과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힘껏 노력했음에도 전혀 그렇지 못한 날도 있는 법입니다. 상반된 두 날은 각각 별개인 날들이 아니라 공부라는 일련의 과정에서 생기는 리듬이고 흐름입니다. 하루의 결과야 어떻든 우리는 그날그날 최선을 다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중요한 건 그 모든 과정을 지치지 않고 포기하지 않도록 지속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가장 좋은건 꾸준히 자기 스스로에게 위로와 격려를 하는 겁니다. 다만 무비판적으로 안일한 태도를 갖는 건 위험합니다. 자신의 공부 리듬과 집중을 방해하는 요소가 어떤 것인지 면밀히 관찰하고 평가해야 해요. 생활 리듬은 습관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나의 리듬을 살펴보아야 하고 좋은 습관을 들이려 애써야 하죠. 좋은 습관과 리듬을 유지할 때 결과물도 좋은 법이니까요.

공부하는 과정은 일을 해나가는 과정과 다르지 않습니다. 공부든 일이든 긴장만큼이나 이완이 중요하기 때문에 정말 필요한 순간에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하죠. 그러자면 스스로의 리듬을 조절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이야기하지만 그 과정 중에 끊임없이 스스로를 위로하고 격려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좋은 두뇌나 남다른 집중력보다 더 중요한 자세입니다.

사실 인생은 자신의 뜻이나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갈 때가 많습니다. 주변에서 끊임없이 무슨 일이 일어나고 그중 많은 문제가 우리를 괴롭히죠.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아마도 계속 그럴 겁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그것은 그것이고 나는 내가 할 일을 한다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    중요한 건 내가 해야 할 일을 그냥 해나가야 한다는 겁니다. 내가 어쩔 수 없는 일과 내가 할 일을 구분해야 해요. 그 둘 사이에서 허우적거리지 말고 빨리 빠져나와야 합니다. 또한 벗어났다고 해서 다시 빠지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 늘 들여다보고 구분 짓고 빠져나오는 연습을 해야 해요. 사실 학생들이나 어른들이나 잘 못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어떻든 소년기에는 글을 좋아하지 않았고 저에게 글공부하라고 닦달하는 어른들이 미웠습니다. 닦달을 받았던 것은 오히려 저한테 잘된 일이었지만, 어쨌든 저로서는 잘하지 않았습니다. 억지로 시키지 않으면 배우지 않았을 저였습니다. 하는 일이 비록 좋아도 억지로 하면 잘 안 하는 법입니다. ~ 저에게 배움을 강요한 그들도 제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꿰뚫어 보지 못했습니다. 그저 충만한 빈곤, 욕된 영광을 두고 채우지 못할 욕심을 채우려는 것 말고는 몰랐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중에서

안정적인 삶, 평온한 삶이 되어야 그때 비로소 내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요. 이것은 착각입니다. "지금 사정이 여러모로 안 좋고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이 일을 혹은 공부를 할 수 없어. 나중에 좀 편안해지고 여유가 생기면 그때 본격적으로 할 거야"라고 하지만 그런 시간은 잘 오지 않아요. 아니, 끝내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왔다고 하더라도 이미 필요가 없거나 늦을지도 모르고요.

인간이라는 존재는 어떻게 보면 처음부터 갈등과 긴장과 불안의 연속 가운데서 일상을 추구하게 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평안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삶이기도 하고요. 결국 고통이 있다는 것은 내가 살아 있음의 표시입니다. 산 사람, 살아 있는 사람만이 고통을 느끼는데 이 고통이 없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모순이 있는 소망이겠지요. 존재하기에 피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우리는 공부하고 일하며 살아갑니다.

매일 출근해 일하는 노동자처럼, 공부하는 노동자는 자기가 세운 계획대로 차곡차곡 몸이 그것을 기억할 수 있을 때까지 매일 같은 시간에 책상에 앉고 일정한 시간을 공부해줘야 합니다. 머리로만 공부하면 몰아서 해도 반짝하고 끝나지만 몸으로 공부하면 습관이 생깁니다. '하비투스'라는 말처럼 매일의 습관으로 쌓인 공부가 그 사람의 미래가 됩니다.

그리고 그런 습관을 만들기 위해서는 나의 생활패턴과 성향을 잘 분석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실패할 계획을 세워놓고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의기소침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어느 시간에 더 집중을 잘하고 어느 시간에 집중을 못하는지, 또 어떨 때 감정적으로 쉽게 무너지는지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잠은 적어도 얼마만큼은 자야 집중력을 오래 유지할 수 있는지와 같은 사소한 것도 알아야 합니다.

 로마 유학 중에 수업의 내용과 용어조차 못 알아들었던 제 석사 과정도 그렇게 크고 작은 시행착오를 반복하면서 흘러갔습니다. 그러면서 실력은 착실히 쌓인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공부는 자동판매기가 아니었어요. 당장 결과가 좋지 않은 경우가 수두룩하지만 꾸준히 체계적으로 학습량을 쌓은 두뇌는 어느 때부터 '화수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던 시간이었습니다. 분명히 '아무리 공부해도 무능한 노동자'라고 수없이 자기 자신을 책망했던 시간이 머쓱해질 때가 올 겁니다. 결국 공부는 성숙을 배워가는 좋은 과정입니다. 힘들게 공부하는 과정 중에 자기 자신과의 소통을 경험할 수 있어요. 좋지 않은 결과를 맞이하게 되면 자신의 한계를 보기도 하고 남과 비교하면서 스트레스를 받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또한 끊임없이 지독한 나, 열등한 나와 조우하게 되고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처럼 "자신을  가엾게 여길 줄 모르는 가엾은 인간보다 더 가엾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나 자신과 소통하면서 나를 알게 되고 나를 다스리며 성숙해집니다. 자기 마음을 찬찬히 읽어내는 노력을 계속하고 그 마음을 잘 다스리는 학생들이라면 충분히 누구나 마음먹은 일을 잘 해낼 수 있을 겁니다. 저는 공부하는 노동자입니다. 공부라는 노동을 통해 지식을 머릿속에 욱여넣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 나를 바라보는 노동자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싫지 않습니다. 이 책을 읽고 있는 여러분은 과연 어떤 노동자입니까?

저는 학생들에게 공부는 쉽고 어렵고의 문제가 아니라 매듭을 짓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말해줍니다. 어떤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그것을 내가 할 수 있는지 신중하게 판단하고, 그것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으면 끝까지 가보는 연습을 해보라고요. 공부는 시작도 중요하지만 잘 마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네가 주기 때문에 나도 준다'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개인이든 국가든 상대에게 줄 수 있는 그 무언가가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생각해봐야 합니다. 과연 나는 타인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요? 어떤 것을 준비해야 할까요? 국가와 국가 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다른 나라와 관계를 맺을 때 우리가 얻고자 하는 바를 위해 상대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갖출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하고요. 줄 수 있는 무언가를 갖추는 것, 그것이 결국은 힘이 되고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길일 겁니다.

어쩌면 삶이란 자기 자신의 자아실현만을 이해 매진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준비 속에서 좀 더 완성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안에서 자아실현은 덤으로 따라오는 것이 아닐까요? 도 우트 데스.

살면서 겪게 되는 어려움 가운데는 외적인 요인도 많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우리 자신이 뿌려놓은 태도의 씨앗들 때문인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 씨앗의 열매들 중 어떤 열매는 기쁨과 행복으로 돌아오겠지요. 하지만 어떤 열매는 고통과 괴로움이 되어 오기도 할 겁니다. 그때 우리는 그 누구도 원망할 수 없습니다. 그저 이제 다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며 내가 뿌린 씨앗을 생각해보게 되겠지요. 그때 시간은 진정 모든 일의 가장 훌륭한 재판관이 될 겁니다.  여러분은 어떤 태도를 지니고 살고 있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이 겪는 모든 일에 대한 가장 훌륭한 재판관으로 어떤 시간을 맞이하고 싶은가요?

열정적으로 고대하던 순간이 격렬하게 지나가고 나면, 인간은 자기 능력밖에 있는 더 큰 무엇을 놓치고 말았다는 허무함을 느낀다는 겁니다. 즉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어도 개인적, 사회적인 자아가 실현되지 않으면, 인간은 고독하고 외롭고 소외된 실존과 마주해야 한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소외되고 고독한 인간, 특히 윤리적 인간이 비윤리적 사회에서 고통받고 방황하는 모습에서 인간은 영적인 동물로서 이성적 인간이자 종교적 인간을 지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명문을 우리 일상과 접목하면 "인간이 원하고 목표하던 사회적 지위나 명망을 취한 뒤 느끼는 감정은 만족이 아니라 우울이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열정적으로 고대하던 순간이 격렬하게 지나가고 나면 인간은 허무함을 느낍니다. 대중의 갈채와 환호를 받는 연주자나 가수가 공연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 홀로 있을 때 느끼는 감정이 바로 이 문장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법의학 교수님은 이 문장을 말하면서 연예인들이 쉽게 향정신성 의약품에 노출되는 환경에 대해서도 설명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런 우울을 느끼게 되는 위치까지 올라가 그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공부를 해보지 않은 사람이 "공부, 그거 별거 아니야"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성공과 실패를 해보지 않은 사람이 그것에 대해 논한다면 그 말에 무게가 실릴까요? 성공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하면 잘될 거라고 이야기합니다. 혹은 저렇게 하면 실패를 극복할 수 있다고 이야기해요. 하지만 만일 그 사람이 성공하거나 실패해본 경험이 없다면 그들이 하는 말에 귀 기울일 수 있을까요? 한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해보지 않은 사람이 "그것쯤이야"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 말에서 어떤 진정성도 느낄 수 없을 겁니다.

또한 그 달리기 끝에서 느끼는 우울함이나 허망함과 같은 감정들은 결코 부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또 다른 나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이거다'라고 생각해서 열심히 달려갔다가, 막상 이루고 나서야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니었다는 걸 깨닫기도 합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에 기뻐하고 슬퍼하는지,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는 달려본 사람만이 압니다. 또 그게 내가 꿈꾸거나 상상했던 것처럼 대단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만큼 불필요한 집착이나 아집을 버릴 수도 있어요. 그만큼 내가 깊어지고 넓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치열하게 달려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공부든 사랑이든, 일이든 무엇이든 간에 그럴 수 있는 뭔가를 만나고 그만큼 노력을 한 다음에 찾아오는 이 우울함을 경험해보기를 바랍니다. 그러고 나면 아마도 또 다른 세계가 여러분 눈 앞에 펼쳐질 겁니다.

Si vis vitam, para mortem. 시 비스 비탐, 파라 모르템. '삶을 원하거든 죽음을 준비하라.'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을 불행하게 사는 것도, 과거에 매여 오늘을 보지 못하는 것도 행복과는 거리가 먼 것이 아닐까요? 10대 청소년에게도, 20대 청년에게도, 40대 중년에게도, 70대 노인에게도 바로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아름다운 때이고 가장 행복해야 할 시간이에요. 시인 호라티우스와 키팅 선생의 말은 내게 주어진 오늘을 감사하고 그 시간을 의미 있고 행복하게 보내라는 속삭임입니다. 오늘의 불행이 내일의 행복을 보장할지 장담할 수 없지만 오늘을 행복하게 산 사람의 내일이 불행하지만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카르페 디엠, 오늘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보통 나와 같은 또래의 사람이 무언가 큰 성취를 이루었을 때, 나는 그동안 뭐했나 싶은 생각을 하거나 아무것도 이룬 게 없다는 생각에 좌절감과 열등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절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나 스스로를 미워하고 학대하는 것과 같아요. 사회로 나가면 언제든 대체로 내가 처한 상황은 불리합니다. 나를 칭찬하는 사람들보다 나를 폄하하려는 사람들이 많고, 나를 치켜세우려는 사람보다 깎아내리려는 사람이 더 많죠. 그런데 이런 환경 속에서 나마저 나를 미워한다면 더 이상 누가 날 사랑하겠습니까? 나마저 자기 자신을 힘들게 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내 나이 또래의 사람이 무언가 이뤘지만 나는 아직 눈에 띄게 이룬 것이 없다면, 그와 내가 걷는 걸음이 다르기 때문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나와 그가 가는 길이 다를 뿐이죠. 인간도 같은 나이라 해서 모두 같은 일을 하지 않고 같은 방향으로 가지는 않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저마다의 걸음걸이가 있고 저마다의 날갯짓이 있어요.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고 이때 중요한 것은 '어제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은 정확히 모르는 내 걸음의 속도와 몸짓을 파악해나가는 겁니다.

 공부는 무엇을 외우고 머릿속에 지식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걸음걸이와 몸짓을 배우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오늘 인생이라는 학교에서 배워야 할 걸음걸이는 무엇일까요? 어떤 몸짓과 날갯짓을 배워야 할까요?

In omnibus requiem quaesivi, et nusquam inveni nisi angulo cum libro.

내가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더 나은 곳은 없더라. -토마스 아 켐피스(독일의 수도자이자 종교 사상가)

운동도 공부하듯이 꾸준히 해야 건강을 지키고 공부도 더 잘할 수 있다고요.

공부는 고도의 집중이 요구되는 것이죠. 이건 때로 머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을 머릿속에 마구 구겨 넣어야 하는 강제 노동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걸 하루 10시간 이상 한다면 몸에서 탈이 날 수밖에 없고 효율도 오르지 않습니다. 시간을 많이 들인다고 효율이 높아지는 게 아닙니다. 시간 대비 최고의 집중력을 발휘해야 최고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겁니다.

머리와 몸은 이미 여러 가지 것을 강제로 수용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휴식은 그런 머리와 몸을 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합니다. 휴식의 종류와 방법에 대해서는 따로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마 각자에게 가장 적합한 방법이 있을 겁니다. 누군가는 한두 시간씩 산책을 하는 게 좋을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영화나 만화책을 보는 것도 휴식이 될 겁니다. 혹은 게임도 지나치지만 않다면 휴식의 일환이 될 수 있고요.

운동은 특히 권하는 바입니다. 일이든 공부든 체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오래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너무 집중하다 보면 욕심이 생기고 쉬는 것을 잊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쉬는 시간마저 아깝게 느껴지는 지경에 이르기도 합니다. 소위 이런 사람들을 '워커홀릭'이라고도 하죠? 그럴수록 의식적으로 공부로부터, 일로부터 스스로를 떼어놓아야 합니다. 이것은 장기 레이스에 임하려면 필수적인 자세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공부하거나 일하고 있다면 한 번쯤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하루에 얼마만큼의 시간을 휴식에 떼어놓고 있는지, 그 휴식의 방법은 여러분에게 진정한 쉼이 되는지 말입니다.

Tantum videmus quantum scimus. 탄툼 비데무스 콴툼 쉬무스. '우리가 아는 만큼, 그만큼 본다.'

아는 사람은 그만큼 잘 보겠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성찰하는 사람은 알고, 보는 것을 넘어서 깨달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토레 아르젠티나'에서 온 그 어떤 독재자가 알고 본 것에서 더 나아가 성찰하는 사람이었다면, 저 멀리 이국에서 온 저와는 아주 다른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사람은 자기 삶을 흔드는 모멘텀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를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 힘은 다양한 데서 오는데 그게 한 권의 책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일 수도 있고, 한 장의 그림일 수도 있고, 한 곳의 음악일 수도 있습니다. 또 이렇게 잊지 못할 장소일 수도 있고요. 그 책을 보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알았기 때문에, 그 그림을 알았기 때문에, 그 음악을 들었기 때문에, 그 장소를 만났기 때문에, 새로운 것에 눈뜨게 되고 한 시기를 지나 새로운 삶으로 도약하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그런 모멘텀은 그냥 오지 않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과도 같을 겁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깨어 있고 바깥을 향해서도 열려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래야 책 한 권을 읽어도 가벼이 읽게 되지 않고 음악 한 곡을 들어도 흘려듣지 않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와의 만남도 스쳐 지나가는 만남이 아니라 의미 있는 만남이 될 것입니다. 한순간 스치는 바람이나 어제와 오늘의 다른 꽃망울에도 우리는 인생을 뒤흔드는 순간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뒤흔든 무언가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인가요? 그처럼 흔들리고 나아가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혹 그와 같은 뭔가를 아직 만나지 못했다면 천천히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내가 알고자 하는 마음조차 없었던 것은 아닌지, 깨어 있으려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욕망을 없애려 하거나 억압하려고 하면 오히려 인간을 무기력하고 굴종적인 존재로 만들기 때문에, 스피노자는 이성으로 인간 욕망을 지배하거나 억압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욕망을 통해 창조적이고 능동적인 인간을 바라보고자 했어요. 다만 스피노자가 말하는 욕망은 인간의 능력, 자유와 예속의 문제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무작정 쾌락을 즐기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있어 욕망은 긍정적이고 능동적인 것이죠. 중요한 것은 욕망과 관련하여 무엇이 자기 능력을 증대시키고 자유롭게 만드는지 아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스피노자는 "예속적인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 활동하지 못하고 그저 운에 따라 이리저리 휩쓸리거나, 자신보다 강한 능력을 지닌 개체에 압도되어 수동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예속적일수록 무엇이 자기에게 유리한 것인지를 판단할 능력을 잃으며, 이로 인해 자신의 능력을 증대시킬 적합한 관계를 형성할 수 없게 된다. 여기서 욕망은 그저 맹목적인 채로 남아있고, 자신의 능력이나 활동을 확대시키지 못한 채로 무수한 단절과 실패만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인 우리는 어떻게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으며 예속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이를 위해 스피노자는 자신의 욕망과 능력을 긍정하는 방식에서 출발합니다. 저는 먼저 제가 일상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바라봅니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조차 저는 '욕'하고 '망'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Desidero sed satistacio. 데지데로 세드 사티스파치오. '욕망한다. 그러나 나는 만족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봅니다. 어쩌면 문제는 욕망하는가 아닌가에 있지 않고, 무엇을 욕망하는가에 있지 않은가 하고요. 무엇을 욕망하고, 무엇을 위해 달릴 때 존재의 만족감을 느끼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나를 충만하게 하는 욕망이 필요한 때입니다.

라틴어로 '공부하다'란 동사의 원형은 '스투데레studere'이고 여기에서 영어의 '스터디study'가 유래했습니다. 본뜻은 '전념하여 노력하다, 갈구하며 몰두하다'로,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며 노력하는 것이 '공부하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나라에서 퇴계의 '경' 사상을 학습법에 적용하면 "한 곳에 몰입하여 다른 쪽으로 마음을 쓰지 않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퇴계는 이를 학습의 으뜸 중의 으뜸으로 꼽았습니다. 퇴계가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마음에 있는 것과 사물에 있는 것이 두 가지가 아님을 분명하고 투철하게 알아야 한다"라고 한 것과 맥이 통하는 말입니다. 아울러 그는 "공북 몸에 배도록 익히는 작업이 중요한데 익히는 일은 어떤 것이든 하나에 몰입하는, 이른바 정신 집중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전했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각자에게 맞는 공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을 찾아가는 첫 단계가 공부의 시작이라고도 말씀드렸고요. 이를 통해 우리는 '나'에 대해서도 좀 더 알아가게 됩니다. 나에게 맞는 공부 방법이 무엇인지 살치다 보면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알게 됩니다. 또 어떤 때 집중이 잘되고 어떤 때 안 되는 지도 알 수 있고요.

이런 훈련은 나아가 인간관계에서 나의 태도, 나의 대화법 등 인생의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살아가는 데 중요한 것은 타인의 방법이 아니라 나의 방법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묻고 찾아야 한다는 겁니다. 남다른 비결이나 왕도가 없다는 사실은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그렇기에 묵묵히 해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신약성서 루카복음 13장 33절에 수록된 문장은 이러한 인간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Verumtamen oportet me hodie et cras et sequenti die ambulare.

베룸타멘 오포르테트 메 호디에 에트 크라스 에트 세쿠엔티 디에 암불라레.

사실은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계속해서 내 길을 가야 한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의 길을 잃지 않고 잘 가고 있습니까? 그 길을 걸으며 무엇을 생각합니까?

그 길 위에서 지치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 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우리 모두는 생을 시작하면서 삶이라는 주사위가 던져집니다. 어른들에게 물어보세요. 돌이켜보면 시간은 그렇게 많이 남아 있지 않다고 입을 모아 말할 겁니다. 신에게도 물어보고 싶습니다. 제게 남은 시간은 얼마만큼이냐고요. 하지만 신은 침묵으로 답하겠죠. 누구도 자기 생의 남은 시간을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그냥 그렇게 또박또박 살아갈밖에요. 곁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충분히 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자주 물어보아야 합니다.         나는 매일매일 충분히 사랑하며 살고 있는가? 나는 남은 생 동안 간절하게 무엇을 하고 싶은가? 이 두가지를 하지 않고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신약성서 마태오복음 6장 34절

Nolite ergo esse solliiti in crastinum crastinus enim dies sollicitus erit sibi ipse sufficit diei malitia sua.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한 사람의 책꽂이에 꽂힌 책은 그 사람을 말해주는 단서라고들 합니다. 수많은 책들 중에서 관심이 가고 읽고 싶어서 고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식처럼 책을 꽂아둔 게 아닌 한 그 사람이 읽은 책은 그 사람을 말해주는 아주 좋은 도구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 사람에 대해 알 수 있는 또 다른 것이 있어요. 바로 그 사람의 기본적인 표정입니다. 링컨은 "나이 마흔이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쳐야 한다"라고 했어요. 그게 무슨 말이냐면 그 사람의 기본적인 성정과 삼정들이 쌓여서 마흔이 되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뜻이에요. 화가 많고 부정적인 사람의 인상과 평소에 잘 웃고 삶이 긍정적인 사람들의 얼굴은 달라요. 그래서 저는 학생들에게 쉽지만 어려운 숙제를 가끔 내줍니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러 갔을 때 세면대 위 거울 속에 서 있는 자신을 향해서 웃으라는 겁니다. 여러분도 한 번 해보세요. 쉬울 것 같지만 쉽지 않은 숙제예요.

아침에 일어나 세수할 때 거울 속에 비치는 자신을 보고 웃는 것은 나 자신에 대한 위로와 격려입니다. 희망과 기쁜 일보다 절망과 고통스러운 일이 많을수록 그러한 자기 긍정이 필요합니다. 또한 그런 자기 자신에게 웃어주듯이 또 다른 타인에게도 웃어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자, 그렇게 하겠다는 의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절망하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내일로 미룰 수 있는 힘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웃음을 주는 내가 존재할 때 가능합니다. 

Hoc quoque transibit ! 혹 쿠오퀘 트란시비트! '이 또한 지나가리라!'

지금의 고통과 절망이 영원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어디엔가 끝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마침표가 찍히기를 원하지만 야속하게도 그게 언제쯤인지는 알 수 없어요. 다만 분명한 것은 언젠가 끝이 날거라는 겁니다.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그러니 오늘의 절망을, 지금 당장 주저앉거나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끝 모를 분노를 내일로 잠시 미뤄두는 겁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에 나를 괴롭혔던 그 순간이, 그 일들이 지나가고 있음을, 지나가버렸음을 알게 될 겁니다.

우리가 머물지 않고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이규보 - 동국이상국집 중

"부처님 말씀에 본래 얻고 잃는 것은 없고 잠시 머물 뿐"이라 했습니다. 불가에 완전이란 없어요. 진정한 완전이란 완전의 상태에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웃고 울 일들이 일어나고 또 지나가고 그렇게 반복해가는 것일 겁니다. "완전이란 이미 이루어진 상태가 아니라 시시각각 새로운 창조다"라는 말은 그래서 생각해볼 만합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것은 기쁘고 행복한 그 순간에는 최대한 기뻐하고 행복을 누리되, 그것이 지나갈 때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돌아와 웃을 수 있는 순간을 위해 지금을 살면 됩니다. 힘든 순간에 절망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분노를 잠시 내일로 미뤄두는 겁니다. 그 순간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려 보는 것이죠.

세상에 지나가지 않는 것이 무엇이고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모든 것은 지나가고 우리는 죽은 자가 간절히 바란 내일이었을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지나가는 것들에 매이지 마세요. 우리 조차 유구한 시간 속에서 잠시 머물다 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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